
Logic 내장 신디 es2의 모듈레이션 라우터의 합성 가능한 타깃과 소스들을 설명하는 매뉴얼. 하나하나 작동시키며 듣고 있으면 뇌가 멍해진다.
스스로를 훌륭하거나 뛰어난 드러머라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17년 동안 쌓인 경력 덕분에 어떤 상황에 닥치거나 어떤 사운드를 만들어야 할 때, 별다른 욕심 없이 딱 내가 연주할 수 있는 소리만 내면, 비록 개성이 없고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지만 어쨌든 나와야 할 소리를 만들어 낸다.
그렇게 무난히 쉽게 손발 가는 대로 연주를 해오다 갑자기 미디를 익히고, 내가 한 번도 다룬 적 없는 소리들을 미디로 찍어내자니, 손에 익지 않아 답답하기도 하지만 왠지 상상의 길이 막히는 느낌을 받는다. 드럼을 연주할 때 머릿속 리듬을 상상하면 그게 바로 손발로 나오는 게 너무나 당연했는데 그걸 머리만으로 상상하려니 굉장히 부자연스럽다. 사실은 여태까지 머리가 손, 발을 움직인 게 아니라 반대로 손, 발이 먼저 움직이면 뇌가 따라간 게 아닐까?
편곡은 더 문제다. 30년 넘게 들어온 악기 소리들 한번 만들려면 관련 매뉴얼과 튜토리얼 영상을 봐야 하니 전체적인 그림을 상상하기까지가 낯설고 어렵다. 내가 이렇게 음악적인 감각이 없는 사람이었나? 드럼 칠 때 나름 음악적으로 잘 받쳐준다는 얘기 좀 들었던 것 같은데?
한탄해봐야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이를 생각하며 빨리빨리 무언가를 만들려는 마음부터 내려놔야 한다. 그래야 매뉴얼의 글자가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고 악기를 연습하듯 가상악기를 듣고 상상하고 찍을 수 있다.
아무도 커리큘럼을 제시하지 않으니 당장 내게 필요한 것들부터 찾아가며 익힌다. 요즘 2곡을 함께 작업 중인데, 하나는 이미 믹싱 중이고, 나머지 하나는 코드와 멜로디만 겨우 쓴 상태다. 믹싱을 위한 책과 여러 자료를 보며 하나하나 노브를 돌리며 소리를 만들다 보면 특정 기능이 궁금해져 그 기능의 자료들을 뒤적이고 이래저래 실험하다 원래 하던 작업이 산으로 가버린다. 새로 쓴 곡의 편곡도 다르지 않다. 아날로그 신시사이저 패드를 깔기 위해 이미 만들어진 프리셋들을 뒤지다 점점 궁금해져 신시사이저의 소리 합성 방식부터 시작해 Logic에 내장된 신시사이저의 모든 기능을 하나하나 뒤적이고 책을 뒤적이고 온갖 튜토리얼을 파헤친다. 이래서는 올해가 다 지나도 한 곡조차 완성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런 식의 장대한 삽질 같은 공부를 안 할 수도 없다. 내 음악을 위해 곡을 쓰고 공부를 하는 거지 학생이 시험기간 맞춰서 곡을 발표하듯 음원을 뱉어내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결국 공부는 계속 천천히 맘을 내려놓고 원하는 만큼 하고 동시에 편곡은 믿을만한 동료에게 맡기기로 한다.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지만 어차피 내가 할 음악은 혼자서 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전능한 창조자가 되어 내 곡을 완벽하게 완성시키는 비르투오소가 되고 싶다는 상상도 종종 하긴 하지만 이제 와서 노리기엔 조금 큰 욕심인 것 같다.
아마 이렇게 백수처럼 살며 공부하는 게 60세 전에 거의 마지막이지 않을까? 하루도 안 거르고 조금씩 자라나는 나무처럼 마음을 내려놓고 한 걸음씩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