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번데기처럼 내 안으로 잠겨들어가 날 쌓고 있다. 이것은 수많은 불안과 막연한 희망을 품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순례자의 이야기다.

2001년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드럼을 처음 시작한 이래 자그마치 17년이 다 되어간다. 드럼을 처음 시작할 때 "10년이 지나면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까?"라는 생각을 하였는데, 별 재능도 없는 나라는 사람이 이만큼이라도 드럼을 연주할 수 있고, 또한 많은 사람이 찾아주고 많은 공연을 해낸 건 나름 뿌듯하고 인상적이라 느낀다. 반면 20년 가까이 비슷한 모습으로 수많은 공연을 하다 보니 매너리즘을 동반한 슬럼프를 피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이 블로그를 만들고, 홈페이지도 만드는 등 드러머로서 변화하기 위해 나름 발버둥을 쳐봤지만, 슬럼프를 이겨내지는 못했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 내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드러머로서 뭔가 문제가 아니라, 음악가로서 내 음악을 연주하고 싶다는 갈증을 참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연주를 많이 줄이고 나 혼자 작사, 작곡 및 미디와 음향 같은 프로듀싱에 대한 공부들을 시작하고 싶었다. 이제까지 해 오던 대로 드러머로서 - 반주자로서 여러 활동을 지속하며 창작활동을 하기엔 나의 체력과 집중력의 한계가 명확했고, 결국 연주를 내려놔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2017년부터 조금씩 주위 동료들에게 뜻을 밝히고 연주를 대부분 내려놓았는데, 참 어려웠다. 몇 년간 그렇게 연주가 지겨웠지만 그래도 무대에 서고 사람들과 연주하는 게 천성적으로 체질에 맞는 나였으니까. 그리고 스스로 기회를 놓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연주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던 경제적인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수년간 스스로 해야만 한다는 과제를 놔두고 남의 음악만 계속하다간 어차피 내가 못 버티고 드럼을 관둘게 확실했으니까.
작년 2017년 가을쯤부터 일을 대부분 놓고 - 몇몇은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작업실 가족들, 혹은 회사 계약으로 묶여있는 밴드 -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 물론 시간과 공간이 마련되었다고 저절로 음악이 나오는 건 아니다.
드럼만 연주하던 사람이 갑자기 시야를 넓혀 프로듀서를 하겠다는 건 축구선수가 아무런 훈련과 경험 없이 축구 감독을 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처음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모르고 그냥 멍하니 음악만 들을 때가 허다했다.(요새도 자주 그런다.) 토나올만큼 넘치는 자료와 말만 하면 순식간에 음악을 꾸며줄 동료들이 주위에 가득했지만 나 자신을 표현하는 건 아무도 해줄 수 없는 일이다.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 미디 같은 도구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심지어 10년 넘게 연주하던 드럼을 미디로 표현할 때의 그 이질감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저 직관을 나침반으로 여기고 수많은 자료와 조언을 지도 삼아 한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주위 동료들이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 적잖은 갈등에 휩싸인다. 그냥 드럼에 더 집중할걸 그랬나? 아니면 다 들어엎지 말고 재즈 사운드 안에서 동료들과 협업하는 빠른 길을 택할걸 그랬나? 나이 마흔 살이 다 되어가는데 또 학생 놀음이라니.. 그래도 이것이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한 마지막 기회가 아닌가 싶다.